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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도난으로 태어난 전설

by dalvit 2025. 4. 24.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년경, 목판에 유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소, 운명이 바뀔 뻔 했습니다.
1911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점의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림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세계가 술렁였죠. 신문은 며칠간 그 미소의 실종을 헤드라인으로 뽑았고, 사람들은 매일 아침, 사라진 초상화를 이야기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도난 사건 이후, 이 그림은 더 이상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신화가 되었고, 그 미소는 전설로 남게 되었죠. 우리는 이 그림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영화 같은 실화, 그리고 한 점의 그림이 어떻게 전 세계의 상징이 되었는지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예술과 범죄, 대중과 기억, 그리고 ‘잊히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이 미소가 지금껏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유—그건,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한 번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1.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모나리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단순히 붓을 든 예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화가이자 해부학자, 천문학자이자 공학자였고,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유의 인간이었죠. 그의 노트에는 수학 공식과 해부학 스케치, 비행기 설계도와 성찰적인 문장들이 빼곡히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려는 그의 욕망은 언제나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그것은 곧 예술로 이어졌습니다.
모나리자는 바로 그 예술성과 사유의 결정체 중 하나였습니다. 1503년경, 그는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의뢰를 받아 그의 아내, 리사 겔라르디니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한 의뢰를 넘어서 다 빈치에게 오랜 시간 머무는 작품이 되었죠. 그는 이 그림을 수년에 걸쳐 반복해서 다듬었고, 완성한 후에도 소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습니다. 훗날 프랑스로 거처를 옮기면서도 모나리자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동반자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 속 여인의 표정은 오래도록 사람들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정면을 응시하면서도 마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 입꼬리에 머문 듯 사라지는 미소는 보는 이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누군가는 따뜻한 미소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고 말하죠.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감정의 거울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보는 이의 내면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듯한 착각을 주는 거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본다면, 모나리자는 단순히 유명한 그림이 아닙니다. 회화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존재이자, 예술이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典範)이죠. 명암 처리 기법인 스푸마토(sfumato)의 절정이자,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구현된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정확히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이라는 모티프는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현대 회화와 심리학적 미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는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 주목받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의 대작들이 즐비한 공간 속에서, 모나리자는 다소 소박하고 작게 느껴지는 초상화였죠. 그러나 바로 그 조용한 그림 한 점이, 곧 세상을 뒤흔들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너무나 조용하게, 너무도 믿기 어렵게—그림이 사라진 것이죠.

🌿 2. 그림보다 유명해진 사건 – 도난의 시작

1911년 8월 21일 아침, 루브르 박물관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낯선 정적에 잠겨 있었습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제자리에 걸려 있던 한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겁니다. 그 그림은 다름 아닌, 바로 모나리자였습니다. 단 한 점의 실종이었지만,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이 술렁이기 시작했죠.
그 당시 모나리자는 지금처럼 '세계 최고의 명화'로 불리진 않았습니다. 루브르 안에는 이미 미켈란젤로나 다비드, 라파엘로의 웅장한 걸작들이 있었고, 크기도 작고 색감도 절제된 모나리자는 그저 조용한 그림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몰랐죠. 그 조용한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될 줄은요.
믿기 어려울 만큼 단순한 방식으로 이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범인은 루브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전직 직원, 이탈리아 출신의 유리공 빈첸초 페루자였습니다. 그는 평소처럼 하얀 작업복을 입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고, 월요일 이른 아침—관람객이 들어오기 전—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갤러리로 향했습니다.
그는 그림이 걸린 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액자에서 유리를 분리하고, 나무 패널로 된 그림을 코트 안에 숨겨 그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박물관엔 CCTV도 경보 장치도 없던 시절이었죠. 사람들은 예술품을 훔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페루자는 그림을 훔친 뒤, 수개월 동안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이탈리아 피렌체로 그림을 밀반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국보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론 자신의 애국심을 과시하고 돈도 노렸던 복합적인 욕망이 작용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림은 밀라노의 호텔 방 뒷벽에 숨겨져 있었고, 의심을 품은 화랑 관계자의 제보로 결국 체포됩니다.
사건 직후 루브르는 사실상 폐쇄되다시피 했습니다. 직원 전원이 조사 대상이 되었고, 경찰은 며칠 동안 관람객이 지나갔던 모든 동선을 따라가며 현장을 재구성했습니다. 벽에 남은 흔적, 바닥에 흘린 유리 조각, 손자국 하나하나가 뉴스로 보도되었고, 대중은 '사라진 미소'에 감정 이입을 하기 시작했죠.
한 신문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가 웃고 있었을 땐,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하지만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 미소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절절히 느낀다.” 루브르 앞에는 그림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시민도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회는 충격과 동시에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림 하나의 실종이 단순한 절도를 넘어선 이유는, 그 속에 ‘프랑스의 자존심’이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매일같이 이 사건을 보도했고, 그림의 배경부터 다 빈치의 생애, 모나리자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까지 온갖 해석과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도난 사건을 넘어서, 예술과 대중, 매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게 됩니다. 모나리자는 더 이상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든 '기억'이자 '정서적 존재'가 된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명성은 그림이 사라진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은 종종 기술보다 이야기를 통해 오래 기억됩니다. 사람들은 그림 그 자체보다, 그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사건에 마음을 빼앗기죠. 모나리자의 도난은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이 어떻게 신화가 되어가는지를 보여준, 드라마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 3. 2년 간의 실종과 언론의 열광

모나리자가 사라진 후, 그 자리는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몰랐고, 수사도 제자리걸음을 반복했으며, 사람들은 점차 이 그림을 단순한 ‘도난품’이 아니라 ‘잃어버린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단 한 점의 그림이 사라졌을 뿐인데, 세상은 마치 누군가를 잃은 듯한 감정에 빠져들었죠.
사건 직후 언론은 연일 헤드라인을 통해 ‘모나리자의 행방’을 알리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미소가 사라졌다”, “국보의 실종”, “프랑스의 자존심이 울고 있다.” 언론이 만들어낸 이 문장들은 단순한 제목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집단 감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곧 전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됩니다. 미국, 독일, 일본, 러시아 신문에도 관련 보도가 실렸고, 사람들은 예술품 하나의 실종이 이토록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매료되었죠. 그림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녀를 보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보고 싶다, 확인하고 싶다, 잃기 전에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그런 목소리들이 유럽 곳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의 부재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소유욕과 감정적 유대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은 때로 존재할 때보다 존재하지 않을 때 더 큰 존재감을 가지죠. 모나리자는 이제 더 이상 ‘걸작 중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는 ‘귀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향한 집착은 다양한 방향으로 퍼졌습니다. 거리에는 ‘모나리자를 봤다’는 제보가 쏟아졌고, 장난전화와 엉뚱한 자백도 줄을 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 지하에서 모나리자를 봤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는 자신이 그림을 훔쳤다고 거짓 자수를 했습니다. 경찰은 수백 건의 제보를 일일이 조사했지만, 결국 모두 헛수고였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모나리자를 둘러싼 철학적, 미학적 담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모나리자는 이제 장소가 아닌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이런 말들이 언론을 통해 전파되며, 모나리자는 실물보다 신화적인 이미지로 대중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 시기 루브르는 오히려 관람객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모두가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고, 텅 빈 벽 앞에서 셀카를 찍고, 그녀의 부재를 체험하려 했죠. 모나리자는 사라졌지만, 사람들 곁을 떠난 적은 없었던 겁니다.
그림 하나의 부재가 불러온 이 일련의 현상은 단순한 사회적 사건을 넘어, 예술의 본질을 되묻게 했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이 어떻게 존재보다 더 깊게 각인될 수 있는지. 기억과 상징이 어떤 방식으로 형상보다 강력한 감정을 남기는지. 이 모든 질문을 남긴 채, 모나리자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실종자가 됩니다.

🌿 4. 피카소도 의심받다? – 반전의 연쇄

모나리자 도난 사건 직후, 프랑스 경찰은 몇 년 전 루브르에서 발생한 고대 조각 도난 사건을 다시 주목합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 중에는 당시 파리 예술계의 신예였던 파블로 피카소와 그의 친구 아폴리네르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겐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1910년대 초반의 피카소는 달랐습니다. 그의 작품은 급진적이고 낯설었으며, 종종 기성 세대의 미적 기준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평가를 받았죠. 당시 프랑스 대중에게 그는 ‘재능은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젊은이’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피카소가 의심받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몇 년 전 발생했던 또 다른 도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루브르에서 고대 이베리아 조각상이 사라졌고, 이 작품들이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발견된 것이었죠. 사실 이 조각상들은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수집한 것들이었는데, 그 경위가 밝혀지기 전까지 경찰은 두 사람을 심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심문실에 앉아 있던 피카소는 완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나는 프랑스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이 말은 프랑스 신문에 실리며 그를 향한 시선에 묘한 반전을 만들었죠. 누군가는 그를 ‘예술을 위한 희생양’으로 보았고, 또 누군가는 ‘기성질서에 맞서는 불온한 천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피카소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은 예술과 범죄, 언론과 이미지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적 반전을 남겼습니다. 특히 예술가의 인생이 작품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도 대중에게 소비되기 시작한 지점이기도 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피카소는 단지 화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가진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술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았지만, 언론의 프레임 속에서 그는 점점 신화적인 존재로 부상하게 됩니다. 언론은 ‘의심받았던 피카소’라는 타이틀을 통해 그를 이야기 속 인물로 만들었고, 대중은 점점 더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죠.
이처럼 모나리자 도난 사건은 단지 한 그림의 실종이 아니라, 여러 인물과 감정, 시대의 기류가 얽힌 복합적인 문화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혁신적이지만 아직은 미지의 예술가였던 피카소의 그림자도 조용히 깃들어 있었던 겁니다.

🌿 5. 돌아온 모나리자, 예술계의 슈퍼스타

1913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예술품 화랑. 그곳의 화랑 주인은 한 남성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가 지닌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 그림을 본 순간, 화랑 주인의 표정이 얼어붙습니다. 그 미소, 그 시선—사라졌던 모나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겁니다.
모나리자는 2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한순간에 다시 전 세계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범인 빈첸초 페루자는 그림을 숨기고 “이것은 원래 이탈리아의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다 빈치가 이탈리아에서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프랑스가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명성과 보상을 노린 복합적인 욕망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법정에서도 그의 '애국심'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절도 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모나리자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던 날, 그녀를 맞이한 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배에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다시 루브르에 걸리는 날, 수천 명이 박물관 앞에 모였고, 줄을 서며 그 미소를 다시 보기 위해 기다렸죠. 그녀는 단숨에 ‘전설’이 되었고, 이제는 단지 예술작품이 아닌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습니다.
도난 사건은 모나리자에게 두 번째 탄생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번 사라졌기 때문에 더 강하게 기억되었고, 한 번 비워졌기 때문에 더 큰 존재로 남게 되었죠. 그림이 단지 벽에 걸려 있을 때보다, 사라지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 진가를 알게 된 겁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 미소에는 이야기와 감정, 역사와 논쟁이 덧입혀졌고, 관람객들은 단지 ‘그림을 본다’는 행위 이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신비를, 또 누군가는 고독을 느끼며 그 앞에 서게 되는 거죠.
사람들은 루브르를 방문하면 반드시 모나리자를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 몇 초라도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도 예술의 한 조각이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짧은 만남은 여행의 목적이 되고, 기억의 중심이 됩니다.
돌아온 모나리자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복제본과 패러디, 광고, 영화, 이모티콘에까지 등장하면서 그녀는 현대 문명의 상징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시작이, 바로 한 번의 도난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 6. 그리고 지금 – 우리가 만나는 모나리자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의 진열장 너머, 단단한 유리벽 안에서 모나리자는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루 수만 명이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들고, 대부분의 관람객은 단 몇 초 만에 그 미소와 눈맞춤을 하고는 다시 돌아섭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사람들에게 남기는 인상은 생각보다 큽니다.
모나리자는 이제 단지 회화가 아닙니다. 그녀는 문화 현상이고, 대중 심리의 거울이며, 전 지구적 기억의 아이콘이 되었죠. 예술사 책에 실려 있는 고전이면서도 동시에 인터넷 밈으로 떠돌고, 고요한 초상화이면서도 셀카의 배경으로 재등장합니다. 하나의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다양한 세계와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미묘합니다. 보는 각도,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누구도 정확히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정할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더 많은 감정이 투사됩니다. 모나리자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관람객의 해석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그녀를 ‘본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일종의 성지순례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루브르에 갔다면 모나리자를 꼭 봐야 하고, 그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겨야만 온전한 방문이 된다는 관념이 있죠. 예술 감상의 본질보다는 경험의 일부, 여행의 체크리스트로 자리 잡은 셈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에게서 의미를 발견합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움을, 어떤 이는 시간의 흐름을, 또 어떤 이는 인간 감정의 복잡함을 느끼며 그 앞에 멈춥니다. 그게 바로 이 그림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한 시대에 속한 작품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머무는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도난 사건 이후, 모나리자는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지만, 그 자리는 전 세계인의 시선과 감정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었고,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모든 질문을 남긴 채,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7. 맺음말 – 사라졌기에 더욱 빛났던 미소

모나리자는 그림이기 이전에 ‘이야기’입니다. 그 미소에는 기술도, 역사도, 문화도 담겨 있지만, 결국 우리를 끌어당긴 건 그녀가 겪은 시간과 부재, 그리고 회복이었죠.
우리는 때때로 너무 당연한 것들을 잊고 살죠. 곁에 있을 땐 그 가치를 모르고,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존재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은 어쩌면 그런 삶의 은유였을지도 몰라요. 익숙한 미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전 세계가 그 빈자리를 놓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돌아온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습니다. 상실과 복원의 상징, 그리고 기억의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죠. 그러고 보면 예술도, 사랑도, 기억도… 모두 사라졌다가 되돌아올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여담 하나.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직접 본 이들은 종종 말합니다. ‘생각보다 그림은 아담했고, 여운보다는 그 앞을 가득 메운 인파가 더 인상적이었다고요.’ 미소보다 더 강렬한 건, 어쩌면 그 미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감정일지도 모르죠.
모나리자. 그 미소는 말을 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