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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보다 진짜 같았던 미술 위작 – 예술계를 뒤흔든 거짓의 미학

by dalvit 2025. 5. 14.
한 점의 그림이 세계를 속였다. 그리고 모두가, 그 거짓말을 사랑했다.
예술 작품 앞에선 감탄과 경외만 존재할까요? 아니요, 때로는 수백억 원짜리 그림이 한순간에 종잇장으로 전락하고, 천재라 불리던 화가는 사기꾼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습니다. 위작이란 단어 하나로 수십 년의 경력과 평판, 예술적 가치가 무너지고, 감정사와 큐레이터, 미술관조차 그 충격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이 글은 단순한 작품 해석이 아닙니다. 거장들의 이름 뒤에 숨어 있던 위작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는지를 추적하는 여정입니다.
예술가보다 더 예술가 같았던 위조범, 진품을 감별하지 못한 세계적 미술관과 감정사, 그리고 한 시대를 농락한 ‘가짜’ 작품들. 우리는 지금부터 진짜보다 더 강렬했던 거짓의 이야기, 그리고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 1. 그림을 조작한 자들 – 위작, 예술계를 흔들다

예술은 진실을 담는 그릇일까요, 아니면 보는 이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늘 위작 미술의 세계가 떠오릅니다. 미술계의 위작은 단순한 모조품 제작이나 시장 교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거대한 제도와 그 제도를 둘러싼 권위, 감정, 욕망이 얽힌 복합적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아주 정교한 드라마입니다. 작품 한 점에 얽힌 수십억 원의 가치, 작가의 명성, 미술관의 자존심, 감정사의 판단이 하나의 무대 위에 올라설 때—위작은 그 중심에서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균열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이 작품은 진품입니다”라는 설명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 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진짜’라는 신뢰는, 미학적 감동이나 철학적 사유를 넘어 거대한 금전적 가치로 직결되죠. 그러나 반대로, 그 문장이 흔들리는 순간 미술계는 본질적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뒤로 밀리고, 시장은 혼란에 빠지며,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이름과 제도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니까요.
사실 위작은 예술과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존재해왔습니다. 고대 로마의 조각가들은 그리스 조각을 흉내 냈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화풍을 완벽히 따라 그리며 작품에 서명까지 바꿔 달았으며, 중세 수도원의 필경사들조차 베껴 쓰는 과정 속에서 창작과 모방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작이 예술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회적 이슈로까지 확장된 것은,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 시장이 비약적으로 팽창하면서부터입니다. 이제 위작은 한 화가의 장난이나 연습작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화 권력과 미술관 및 경매사의 위신, 글로벌 자본이 얽힌 거대한 권력 게임의 일부로 진화했습니다.

 

제가 늘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은, 한 위작범이 법정에서 직접 베르메르 풍의 그림을 그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던 순간입니다. 미술사적으로는 ‘가짜’였지만, 그의 붓끝에는 진심이 있었고, 제도에 대한 냉소와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이 엿보였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미술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예술적 해석자였습니다. 물론 저는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이며 위작을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작 사건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심리와 사회적 모순을 엿보게 됩니다. 우리는 진짜를 원하면서도 그 ‘진짜처럼 보이는 것’에 안심하고, 그 신화에 스스로 매혹되곤 하죠. 그래서인지 어떤 위작은 오히려 진품보다 더 절실한 감정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술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세기의 위작 사건 세 가지를 하나씩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첫 번째는 한 네덜란드인,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 그는 어떻게 베르메르를 완벽히 흉내 내 나치 독일의 괴링까지 속였는가, 그리고 왜 그런 사기극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했는가. 그 모든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시작됩니다.

🌿 2. 20세기 최고의 위장범,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작품명: 한 판 메이헤런, 「엠마오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1937년작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이미지로 자유로운 사용 가능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이 이름은 미술사에서 ‘위조’라는 단어를 가장 극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구현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는 1889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처음에는 평범한 화가로 예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의 회화를 냉담하게 평가했고, 그는 결국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죠. 그의 복수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경배하는 예술가—네덜란드 바로크의 거장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새로 '만드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도 정교하게, 너무나도 ‘진짜처럼’ 말이죠.
그는 베르메르의 알려진 작품 수가 매우 적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30여 점 남짓만이 ‘진품’으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만약 새로운 ‘베르메르의 미발표작’이 나타난다면 미술계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죠. 메이헤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베르메르의 종교화 스타일을 상상해냈고, 그에 어울리는 안료와 캔버스를 수집했으며, 17세기 기법으로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위작이 수백 년 된 작품처럼 보이도록 그림을 오븐에 구워 인위적으로 ‘균열’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면, 진짜처럼 늙어 보여야 했으니까요.

 

1937년, 그의 대표 위작 중 하나인 엠마오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 세상에 등장합니다. 네덜란드의 저명한 미술사가 아브라함 브레디우는 이 작품을 발견하자마자 “베르메르의 걸작이 나타났다”고 외쳤고, 이후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 평가에 동의하며 미술관과 정부 기관이 작품을 매입하게 됩니다.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은 단지 예술계를 속인 것이 아니라, 예술계 스스로 그 속임수에 빠지게 만든 겁니다. 진품이라 믿고 싶어 했던 집단 심리가, 그에게 면죄부를 안겨준 셈이죠.
그러나 메이헤런의 위작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맞이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그의 작품 중 하나가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개인 소장품으로 발견된 것이죠. 베르메르의 작품을 파시스트 독일에 넘긴 ‘문화 반역자’로 몰린 그는 심문을 받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메이헤런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놀라운 진실을 꺼냅니다. “그건 베르메르가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입니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고, 그는 법정에서 직접 위작 그림을 재현해 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냅니다.
이 장면은 미술사에서 가장 영화 같은 순간으로 회자됩니다. 예술가가 법정에서 물감을 개고, 캔버스를 펼치고, 수천만 달러짜리 그림과 똑같은 필치로 작업을 재현해내는 것. 그가 그린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도에 대한 도발이었고, 전문가들의 권위에 대한 반격이었으며, 동시에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누가 진짜를 판단하는가?’, ‘무엇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드는가?’ 메이헤런은 비웃듯 묻고 있었고, 우리는 대답할 말을 잃게 됩니다.
결국 그는 나치 협력죄는 벗었지만, 위작 사기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사망하며, 그는 죽는 날까지도 자신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베르메르'를 창조했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를 예술가라 부를 수는 없지만,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라면, 그 정의에는 분명 메이헤런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는 베르메르의 진짜 후계자였을지도 모르죠. 단지 그의 방식이, 시대가 허용하지 않았을 뿐.

🌿 3. 허상을 믿은 시대, 베르메르의 진실을 위장한 그림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의 위작은 단지 기술적으로 뛰어난 수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허상을 정교하게 이용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짜’ 그림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자 상징으로 남게 되죠. 특히 그가 위작한 베르메르의 엠마오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은 단지 하나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 그림은 전후 네덜란드 사회의 문화적 자존심이었고, 동시에 나치에 의해 탈취된 문화재로, 민족 정체성과도 맞물려 있던 존재였습니다.
괴링이 그 그림을 수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술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배신으로 간주됐고, 메이헤런은 ‘진짜’ 베르메르를 팔아넘긴 문화 반역자로 몰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던진 “그건 내가 그린 그림입니다”라는 한마디는 단숨에 사건의 성격을 뒤바꿨습니다. 한 나라의 존엄을 더럽힌 배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치를 속인 ‘문화 첩보원’처럼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을 진짜라고 감정한 이들이 모두 그 분야의 권위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박물관장, 큐레이터, 미술사학자, 감정사들까지.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던 것은 “베르메르답다”는 감각이었지만, 누구도 그림 속 화학 성분이나 안료의 시대적 특성을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능력으로 미술계를 속인 사건이 아니라, 모두가 ‘믿고 싶어 했던 환상’에 기꺼이 몸을 맡겼던 거대한 심리극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위조가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메이헤런의 그림은 정서적으로 당시 대중이 바라던 베르메르의 이미지에 너무나 부합했고, 그래서 그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통해 ‘자신들이 기억하고 싶은 베르메르’를 보았던 것이고, 그 감동은 오히려 과거의 진품들보다 더 크고 직접적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예술은 ‘사실’이 아니라, ‘믿음’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위작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위작은 단지 시장을 교란하는 가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는 진품보다 더 큰 감동을 주고, 진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으며, 권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위작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위작이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는 예술의 가치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더 명확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 4. 믿고 싶은 그림을 그린 남자,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이 고전 회화를 모사한 위작의 대가였다면,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는 20세기 현대 미술을 흉내 내어 미술계를 속인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샤갈까지, 살아 있는 거장들의 화풍을 완벽히 따라 그려냈고, 실제로 수백 점의 그림이 미술관, 갤러리, 부유한 컬렉터들의 컬렉션 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일은 30년 가까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진행되었죠. 그가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위작의 개념이 단순한 복제를 넘어 일종의 예술적 연기이자, 기묘한 심리극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는 헝가리 출신으로, 예술학교를 졸업한 정식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은 전혀 팔리지 않았고, 생활고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 위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따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각 화가의 붓 터치, 색감, 인체 비율, 재료까지 연구했고, 진품이 남기기 쉬운 ‘우연한 실수’까지도 계산에 포함시켰죠. 그는 결코 원작을 복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럴듯한 ‘미발표작’처럼 보이도록 그림을 조합해 재창조했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재능이 빛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작은 미술상들을 통해 거래되며 시장에 스며들었고, 어느 순간 엘미르 자신도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내가 위작한 피카소를 피카소 본인이 진품으로 착각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과장이든 아니든, 그가 위조 기술에서 심리와 문화까지 꿰뚫고 있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만든 그림은 단지 ‘비슷한 그림’이 아니라, 미술계가 ‘믿고 싶어 하는 그림’이었던 거죠.
엘미르의 삶은 거짓말로 쌓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거짓 안에는 절실한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체포와 조사를 받았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신분을 속이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위작을 하나의 ‘작품’으로 여겼고, 미술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위작이란 무엇인가? 누가 진짜를 결정하는가? 예술은 오롯이 창작의 산물이어야만 하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삶 전체로 던졌고, 단지 그림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예술 시스템을 흉내 낸 셈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생애는 오손 웰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F for Fake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작품은 위작, 사기, 진실, 예술이라는 주제를 넘나들며, “거짓도 반복되면 진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는 그 질문에 가장 완벽하게 화답한 인물이었죠. 그는 위작의 달인이었지만, 동시에 ‘위작이라는 예술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가짜 그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진품인 척 걸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그림 앞에서, 감탄하고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듣겠죠. 그리고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감동했다면 그건 정말로 위작일까요?

🌿 5. 진품 감정의 허점 – 감정사는 왜 속았나

위작 사건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미술관, 학예사, 감정사, 경매사 등 전문가 집단이 왜 이렇게 쉽게 속아넘어갔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개인의 실수나 기술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미술계 전체의 구조적 허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위작범이 위대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 체계 자체가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죠.
감정은 과학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직관과 감성, 그리고 ‘권위’에 기대고 있습니다. 작품의 붓질이 화가의 손길처럼 보이는지, 색채나 구성이 기존 작품과 얼마나 닮았는지,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의 경향과 부합하는지 등은 주관적 해석에 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과학적 분석을 동원하더라도, 위작범들은 점점 더 정밀해진 기술로 이러한 분석을 피해가고 있죠. 오히려 문제는 감정보다 ‘사람’에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로 간주되는가—결국 감정은 권력의 게임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유명한 미술사가가 “진짜다”라고 선언하면 대부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이 그렇다는데, 누가 그걸 부정할 수 있을까요? 미술관이나 컬렉터 역시 자신이 이미 거액을 들여 구입한 그림이 진품이라는 믿음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거기에는 자존심과 경제적 손실, 명예까지 얽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속아주기를 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위작은 이런 심리적 틈을 교묘히 파고들며, 오히려 시스템 전체를 이용해 ‘진짜 행세’를 하죠.
그 결과, 우리는 ‘진품’이라는 개념마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누구의 감정이 더 신뢰받는가, 어떤 미술관이 보증하는가, 시장에서 얼마나 인정받았는가—이 모든 요소들이 진위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곧, 예술 작품의 진실이 ‘내재된 본질’이 아니라 ‘외부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위작은 예술계의 어두운 거울이 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짜’는 정말 진짜일까요? 아니면, 모두가 진짜라고 믿기로 합의한 거짓에 불과한 걸까요?
결국 위작은 단지 사기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권위, 제도, 경제, 심리 전반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현상입니다. 감정의 실패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어떻게 대하고 소비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경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작을 통해, 비로소 예술이라는 세계의 실체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감정사보다 훨씬 더 정교한 감식안을 지닌 위조범이 아니라, 그 위조를 가능하게 한 ‘구조’가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죠.

🌿 6. 맺음말 – 진짜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는 내내 저는 수없이 ‘진짜’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늘 진짜를 찾고, 진짜를 원하고, 진짜를 소비합니다. 하지만 그 진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작품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울림일까요? 혹은 모두가 진짜라 믿는 순간 그것이 곧 진짜가 되어버리는 사회적 합의일지도 모릅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생각보다 허약하고, 때로는 무너지는 그 경계 속에서 예술의 본질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한 판 메이헤런 (Han van Meegeren), 엘미르 드 호리(Elmyr de Hory),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위작범들. 그들은 분명 법적으로는 사기꾼이었지만, 그들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은 진품이 가지지 못한 어떤 질문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정을 모방하고, 붓질을 흉내 내고, 색감을 조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었죠. “그림을 그림답게 만드는 건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진짜를 감별하려는가, 아니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 하는가?”
예술의 세계는 진실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믿음이 있고, 권위가 있으며, 상업성과 제도, 감정과 기호, 욕망이 뒤엉켜 있죠.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진짜를 갈망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믿고 싶은 ‘가짜’를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허상을 진짜로 믿어버렸던 그 순간들, 감탄했던 우리의 눈도 결국 이 복잡한 퍼즐의 일부였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진짜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위작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남깁니다.